나는 어제 3:30에 잤지만 오늘 할일이 있어 9시에 일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8시에 깼는데 "어제 4시가 다되서 잤는데 지금 일어나면 하루 내내 피곤할거야" 라고 하며 고작 1시간 정도를 더 자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10시에 일어나게 되 하루 일정이 쭉 밀리게 되버렸다.


우리는 수많은 상황에서 수많은 기회를 만났지만 고작 미래에대한 사소한 불안감으로 일을 망치거나 기회를 날리고 있다.

이런 상황이 너무 아쉽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계발(혹은 개발)강의를 듣고 기존에 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개개의 삶의 달라지는걸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물론 상기한 의견 또한 충분히 맞다고 보고 있지만 말입니다.

강의를 듣고 생각치 않은 방향으로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의견을 시뮬레이션화 해보자면(?)

강의를 듣게되면 사람들은(저 또한) 그 당시에는 "와... 인생강의다, 나도 저렇게 나아가야지" 라고 합니다.

그러곤 실천을 안하거나 실천을 해도 보통 몇일안가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 이지요.

대다수는 단지 그 당시에만 새로 접한 방향으로 삶을 이끌려고 합니다.  아주 강력한 자기계발 도구가 없다면 말이죠.

 

그래서 저는 강의를 듣는 이유 / 강의의 의미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한번 더 생각하게 해주는 장" 이라고 생각

합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 무작정 각종 강의 컨텐츠를 팔로우 하고 근 4년간 다양한 강의를 온라인으로, 오프라인으로 접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에게 강의는 , 제가 지금 나아가는 방향 혹은 나와 방향은 달라도 비슷한 방법을 시도한 분들의 강의를 들으면 제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지고, 다수의 길이 아니라는 점에서 망설이는 저를 다시 저만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 방향을 찾기 전에는 느낄수 없었던 강의의 힘 이더라구요. 단순히 강의를 접하고 느끼는 점만 다른게 아니라 그 강도 자체가 크게 커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한번 더 생각하게 해주는 장" 이라는 점이 강의를 듣는 진짜 이유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껏 제가 접한 여러 칼럼, 의견, 글 에서는 사람이 죽음을 인지하고, 직면하였을때 그 이전과는 다른 강력한 능력이 발휘되는 이유가 "시간의 유한성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죽음에 직면한 후 변화에 대한 제 생각에서도 위와 같은 내용이 큰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럼 왜 세상에 많은 죽음에 직면한 후 변화에 대한 주장/칼럼을 적으려고 하는가?


저는 요즘 건강, 살에대한 이슈가 아닌 정말 제 내면의 힘을 키우기 위한 목표로써 운동을 학고 있습니다. (- 제 블로그에서 '막연히 시작한 운동' 이라는 것을 보신 분이라면 아실겁니다)

그날도 여느날과 같이 정말 막연히 달렸는데 패이스 조절을 잘못해 정말 계속 러닝을 하기가 어려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생각이 "아 힘드네, 계속 달리면 심정지로 쓰러질까?" 정말 이거였습니다. 물론 그때는 "죽진 않겠지" 하고 쭉 달려나갔습니다.

그날 러닝을 마치고 샤워를 하며 더 생각을 해보니 우리가 무언가를 할때 제일 궁극적인 걱정이 죽음에 관한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그날 러닝을 하며 했던 고민과도 같은것이죠, 하지만 숨이 차 죽을것 같은 상황에서 러닝을 마치면 내가 죽는다 라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어떨까요?

저는 "어짜피 달리기가 끝나면 나는 죽는데 지금 달리면서 숨이 차 죽는것과 뭐가 다를까?" 라는 생각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 앞으로 뛰어 나가리라 생각합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하니 우리가 여러 고난의 문턱에서 정말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어떤 목표가 있으면 그것에 제 삶 자체를 걸만한 아주 강한 투기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여러분들도 어떤 목표달성에 있어 큰 희생을 각오한다면 저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오늘, 얼떨결에 큰아버지를 뵈어 이야기를 하다 오게 되었습니다.
-큰아버지께서 저희집에 전해주실게 있어서 누군가는 받으러 나가야 하는 상황에 가위바위보를 해 누가 나갈지 정하기로 하여 어머니가 걸리셨는데 아버지한테 넘기신걸 다시 제가 하겠다고 해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나가서 전해주센다는(빵 이였습니다)걸 전해 받고, 같이 저희집으로 들어가자고 하시니 갑자기 저를 대리고 큰아버지가 제게 말씀하시기를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사회의 풍토를 따라 삶을 개척하는것이 훨씬 안전하고, 확률도 높다고, 홀로 삶을 개척하는것은 어렵고, 확률도 낮다고 하셨습니다.

큰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면 / 더 나아가 보통의 시각에서 보자면 위의 말씀은 확실히 바른 길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실제로 이제껏 저러한 길을 택하시는 분들도 많거니와 그중에서도 잘 지내시는 분들도 많은것이 사실이니깐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의견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께 해드리고 싶은 말은 안정적이란 이유로, 남들과 같은 방향의 길을 택하지 말자고 하고싶습니다.

한 생물의 인생은, 한 순간은 한번 뿐이며, 우리 모두는 모든것이 다른 존제인데
그래서 생각해보면 아주 소중하고, 독립적인 개성이 있는매 순간, 인생인데 어떻게 그렇게 획일적인 삶을 만드려고 하는 사회 풍토가 왜 생겨났으며, 그걸 깨려는 사람은 왜 그렇게* 적을까요?
*이 내용은 차후에 한번 다룰 예정입니다.

만약 우리가 개인의 개성보다 공동체의 색이 더 중시되는 환경에서 뛰쳐나와 개개의 개성을 살린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세요.

각각의 개성이 필요한 곳에 유동적으로 협업을 하게 될것이고.
이러한 관계는 비단 생산성 향상 뿐만 아니라 삶 이라는 것에 지금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져다 줄수도, 따라서 훨씬 재미있는 삶을 가져다 줄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의 이 포스팅과 독자분의 의견이 다를순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꼭 기억해 주세요.

지금 우리의 시야는 정말 좁습니다.
이 좁은 시야는 너무나도 익숙해서 알아차리기도 힘들지만 정말 문제는 사회의 지속된 조직문화/고정관념 때문에 이 좁은 시야를 알아차리고도 시야를 넓히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아직 대단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넓은 시야를 가졌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넓은 시야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때까지 정말 많은것들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넓은 시야에 관해서도 한번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어이구야... 벌써 글쓰기 시작한지 100분정도가 지나버렸네요.
항상 저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당초 계획의 서너배는 되는 글을 쓰게 되는군요.
어서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Own life from own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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